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방랍의 난 (문단 편집) == 결과 == [[송사]] 동관 열전에 따르면, 방랍의 난에 휘말린 지역이 6주 52현에 이르렀고, 피살된 평민은 200만에 달했다고 한다. 조정은 이절과 강동이 도적에게 피해를 당한 점을 고려해 3년간 부역을 면제하게 했다. 그러나 반란 진압 후 2달도 안 되어 '화석강'을 다시 실시하게 하였다. 이에 진과정(陳過庭)과 장여림(張汝霖)이 송휘종에게 중지할 것을 간청하자, 휘종은 왕보(王黼)로 하여금 탄핵하게 하여 모두 벼슬을 빼앗고 멀리 귀양보냈다. 휘종은 이후에도 예술과 도교에 심취해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는 짓을 멈추지 않았고, 송나라는 이로 인해 국운이 쇠미해졌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상황을 돌이켜보지 않고 마침 눈부시게 성장하던 [[금나라]]와 연합하여 쇠약해지는 [[요나라]]를 협공해 멸망시키고 [[연운 16주]]를 되찾으려 들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요나라의 마지막 군주 [[천조제]]와 손잡고 금나라를 협공하려 하다 발각되었고, [[금태종]]이 분노하여 개봉으로 쳐들어갔다. 결국 [[정강의 변]]이 일어나 북송이 멸망하였고, 송휘종은 아들 [[송흠종]]과 함께 만주로 끌려가서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분류:실패한 쿠데타 및 반란]][[분류:송나라]][[분류:12세기]][[분류:송나라/전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